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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심은 사람들에게 그 사랑의 홍수를 퍼부어 성덕과 구원의 은총으로

그들을 부요하게 하고, 마침내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내려 한다.

- 예수성심 공경과 밤조배 -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

 

예수성심 공경의 유래
예수성심 공경은 근원적으로 프랑스 방문회 수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꼭(1647-1690)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과 성심의 메시지에 기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년 반동안 말가리다 수녀님에게 70회나 발현하셔서 당신 성심에 관한 것을 계시함으로써 성심 공경을 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1673년 12월 27일 사도요한 축일에, 때때로 태양보다 더욱 빛나고 수정처럼 투명하며, 자관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십자가가 있고 상처가 박혀 있으며, 불꽃으로 타는 것 같은 살아 움직이는 당신의 심장을 보여 주시며,

 

“내 거룩한 마음(심장)은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너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내 사랑은 그 불타는 사랑의 불꽃을 이이상 더 내마음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 너의 수고로 이 붗꽃은 널리 퍼져야 한다. 내 성심은 사람들에게 그 사랑의 홍수를 퍼부어 성덕과 구원의 은총으로 그들을 부요하게 하고, 마침내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내려 한다. 나는 너를 부당하고 무식한 그대로 간택하여 나의 계획을 완수하려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계획은 온전히 나의 것임을 모든이들에게 분명히 드러내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부터 예수 성심은 말가리다 수녀님께 자주, 특히 매월 첫 금요일에 발현하셨고, (1) 첫 금요일 보상을 위한 영성체 (2) 성시간 (3) 성심상에 대한 특별한 공경 (4) 미사와 성무일도가 따르는 축일을 지킬 것 (5) 개인, 가정, 국가의 공식적 봉헌 행위 (6) 아침 봉헌을 통해서 공경 행위를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성체 성사안에서 당신께 특별히 보상적 사랑을 바칠 것을 호소하셨습니다.

 

1675년 6월 16일부터 20일 사이 성체 8부 축일동안 말가리다 수녀님이 성체 앞에서 기도하고 있던 중에 예수 성심께서 당신 성심을 보이시며 “보라, 사람들을 이렇듯 사랑했고, 그들에게 이렇듯 많은 은혜를 베풀었건만 이 무한한 사랑에 대해 오직 배은망덕만 당하는 이 성심을! 내 성심은 망각, 무관심, 무례를 견디고, 때로는 특별한 사랑의 유대로써 내 성심과 밀접히 결합된 이들로부터 이 모든 능욕을 당한다.”고 말씀하시고, 그 후 당신성심을 영화롭게 하는 특별 축일을 제정하여 지킬 것을 말가리다 수녀님께 청하셨습니다.

 

 " 나는 성체축일 8부, 첫 금요일을 내 성심을 공경하는 특별 축일로 정하기를 요구한다. 그날 영성체하고 내가 제대위에 현시되는 동안 당한 모든 능욕을 보상하는 영혼들은 나에게 행한 능욕을 기워갚게 될 것이다. 이때 나의 성심은 보상하는 이들에게 사랑의 은총을 홍수처럼 풍부히 내려줄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이것이 성체축일 8부 후 금요일에 지내는 예수성심 대축일의 설정 근거가 되었고(1856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그 후 6월이 예수성심 성월로 정해진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가리다 수녀를 통해 당신 성심께 사랑을 바치고 자신을 봉헌하는 이에게 12가지 축복과 은총을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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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성심 공경의 의미

 

 

예수성심 공경에 있어서, 예수님의 심장 자체가 공경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첫째, 성심은 먼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지시는 순수 인간으로서의 감관적 사랑의 자연적 심볼이고, 둘째, 성심은 사람들에게 대한 인간 예수님의 영신적 사랑을 뜻하는 자연적 심볼이며, 셋째, 성심은 천주 성자께서 하느님스런 사랑을 드러내시는 심볼입니다. 그러니까 성심은 하느님 아버지의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이 송두리째 드러난 상징이고 표현이기에, 그 심장과 함께 우리에게 신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을 드러내시는 천주 성자의 위격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사실 심장으로부터, 온 몸의 혈관을 통해 혈액이 순환되며 우리 몸의 혈관은 총 길이가 약 10만 Km나 되는데, 지구를 두 바퀴 도는 것과 맞먹는 거리입니다. 그 먼 길을 매일 두 번 이상 돌면서 혈액은 하룻동안 약 2십 7만 Km 정도를 여행을 하는데, 그것도 그냥 돌지 않고, 간, 신장, 뇌, 근육 등 신체 곳곳마다 충분한 산소와 영양 물질을 공급하고 또 각 조직에 생긴 탄산가스와 노폐물을 부지런히 거둬들입니다. 따라서 혈액순환이 원만하게 이뤄지면 신체 각 조직에 질병이 생길리가 만무하며, 무언가 혈액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인이 있어서 인체 각 조직에 산소가 부족하고 나쁜 노폐물들이 쌓이고 결국 병들게 되는것입니다. 이물질이 끼어 있는 낡은 수도관으로 물이 잘 흐를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런 심장의 비유를 통해 주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은총을 충분히 묵상할 수 있고, 예수 성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과 은총을 받으려면 우리가 어떤 영혼의 준비를 해야 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군인 하나가 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찔렀을 때,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되어 있는데, 성심에서 나온 물은 죄로 죽을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을 상징하고, 또 피는 새로 태어난 백성을 먹여 기르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예수성심 축일 설정 100주년이 되던 1956년 교황 비오 12세께서 예수 성심 공경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회칙 “Haurietis Aguas"에서 ”구세주의 상처입은 성심에서 그의 피를 나누어 받는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 성심에서 당신 자녀들에게 초자연적 생명을 주는 성사의 은총이 풍부히 흘러 나왔다.... 성심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은총은 마치 일곱 줄기를 지닌 강물처럼 흘러나와 세상의 죄를 씻고 생명과 영적 활력을 불어 넣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사경문의 ‘예수성심 대축일 감사송’에서도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기꺼이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퍼 마시기를“ 바란다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주님의 심장(교회의 심장)에서 흘러나와 혈관을 통해 끊임없이 흐르는 풍요롭고 무한한 혈액은 영신적으로 주님의 은총과 사랑, 곧 성령이 아니겠습니까? 이 은총과 자비, 사랑의 샘으로부터 성령의 흘러넘치는 물을 공급 받으려면, 은총의 장애 요인인 죄가 없어야 하고, 우리 자신이 영신적 이물질을 청소하고 뼈저리게 회개하고 회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까 22장 40절에서 4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그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시고는 돌을 던지면 닿을만한 거리에 떨어져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이때에 하늘에서 내려온 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힘을 북돋우어 드렸다. 예수께서는 마음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굽히지 않고 더욱 열렬하게 기도하셨다. 그러는 동안 핏방울 같은 땀이 뚝뚝 흘러 땅에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스 2장 17절에서 18에는 “그분은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 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라고 되어있고, 히브리서 5장 7절에는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다”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주 성자께서 가지신 천주성과 인성의 사이에서 갈등이 내재하는 신비스런 구속(Redemption)의 신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하느님의 시간표 즉 구원의 섭리 계획 안에서 아버지의 구원사업을 이루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그야말로 사랑하는 제자들 뿐 아니라 성부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외로움, 극한의 고독 체험, 하느님 부재 체험이 진행되고, 예수님께서는 천주성은 있으시나 기능이 없는 상태가 되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마치 당신 공생활 때에 기적이 일어났을 때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았을 때 전구에 불이 들어왔었는데, 고난중에는 하느님께서 플러그를 빼신 상태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그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성으로 철두철미 자원으로 고난받아야 인류의 죄 때문에 아파하시는 성부 하느님의 의노가 풀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인성의 고난은 당신이 자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고난이지만, 당신이 고난의 잔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마시지 않으면, 인간의 죄 때문에 아파하시는 성부 하느님의 의노가 풀리지 않고 인류가 구원받을 길이 없기에, 묵묵히 감수하고 감당해야만 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신앙과 순명의 차원에서는 장차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향해 가야하는데, 예수님의 약한 인성은 너무나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너무나 명백하게 펼쳐질 고난과 죽음의 불안이 엄습하고, 상상력으로는 수천대의 매질과 십자가의 무게, 못박힘의 고통과 못 세 개로 나무에 매달려 찢어지는 고통과 더불어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 죽음의 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더욱 고통스러우셨을 것입니다. “할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아버지 아버지 ....” 한번씩 외칠때마다 섬짓 섬짓하고 심장이 뛰고, 피땀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적셔졌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은 잠이 들었고, 가장 위로해주실 어머니는 가까이 계시지 않고,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말씀과 사랑을 주었건만 그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고 모든게 수포로 돌아가고 나를 버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원망과 허무, 의미없음이 교차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든 고통을 인간성으로 겪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37절에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의 죄가, 무서운 인간의 죄가 하느님의 아드님을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여정에서 죽음에 대한 불안의 정신고통, 마음 고통을 겪어본 적이 있으며, 이것을 인성으로 참아 받고 신앙으로 극복하기 위해 피땀흘리며 기도한 적이 있었던가요? 예수님은 신성으로는 아담으로부터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지을 죄악을 미리 내다보시고, 당신의 십자가의 구속 공로마저 헛되이 돌리게 될 죄마저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영혼들이 교회의 품안에서 당신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용서를 받고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셔서,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묵묵히 고난의 길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인류의 죄 때문에 상처받으시는 주님의 성심을 위로해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발 더 이상 괴로움을 드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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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조배(Night Adoration)


20세기에 와서 성시간과 밤조배(밤중기도) 신심은 페루출신“마태오(Edward Crawley-Boevey Y Murga ; 1875.11.18.~1961.5.4.)” 예수성심회 신부에 의해 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꼭에게 발현하신 예수성심의 메시지에 기초해서, 예수 성심께 가정을 봉헌하는 운동을 조직화하고 예수성심을 가정의 왕으로 모셔, 그분께서 전 세계를 다스리도록 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만방에 전파되었습니다. 마태오 신부님은 “신심깊은 사람은 많으나 영성과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고 강론하시며, “사랑이 사랑 받으시도록 그리고 더욱 더 사랑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그의 열렬한 소망중의 하나요 집념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예수 성심께 영광을 드리는 아주 간단하고 훌륭한 방법으로 마태오 신부님께서 소개하신 밤중기도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마태오 신부님은 “내가 제시하는 것은 복되신 성체 앞에서 여러분이 깨어있을 때와 똑같은 사랑과 보속의 정신으로 집에서 밤조배를 드리는 일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교회의 성시간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로서 집에서 성심상 앞에서 한달에 한 번, 가능하다면 첫 금요일 밤에 행하는 것이고(시편 69장 20절 ; “나는 동정을 바랐으나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를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태 26장 40절 ;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둘째로, 매우 열심한 대가족으로 구성된 가정이 집안 거룩한 곳에서 한 달에 한번(저녁 10시~다음날 새벽5시 ; 저녁 9시~ 다음날 새벽6시) 각자 시간을 정해 끊어지지 않게 밤새도록 조배할 것을 권하십니다.

 

마태오 신부님은 “한번뿐인 밤중기도 시간에 한 사람씩 깨어 있으라고 요구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유다도 공범자들의 무리와 함께 사람의 아들을 배반하기 위해 깨어 있는데, 왕의 절친한 친구라 하는 사도들이 언제까지 잠에 취해 있을 것인가?” 라고 강론하셨습니다. 마태오 신부님은 이렇게 예수 성심을 가정의 왕, 사랑의 왕으로 모시고 가족 구성원이 예수 성심께 봉헌하는 가족들을 ‘베타니아 가족’ 들이라 부르시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공생활 동안 특히 힘드실 때 편안하게 들리셨던 라자로의 집(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이 베타니아에 있기 때문이며, 주님을 편안하게 해 드린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미국에서 가족이 뿔뿔이 제각기 흩어져 있다 하더라도, 예수 성심상을 제각기 있는 곳에 모셔놓고, 한 달의 하루를 정하고 각자의 시간을 정해 촛불을 봉헌하고 예수 성심을 위로해 드리는 밤조배 시간을 가진다면, 예수 성심께서 반드시 그 가정을 강복해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도 눈물로서 예수님의 인류 구원사업에 협력하시듯 이러한 밤조배에 함께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2001년 6월 평화의 모후 선교회 발행 '메주고리예'  소식지 <제6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