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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속의 메주고리예 성모님

허혜경 안젤라 / 의정부 성당 


메주고리예에 다녀온 2001년은 30여년의 길지 않은 제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 특별한 한 해가 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설레임과 성모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은총에 대한 믿음이 이후의 제 삶의 방향을 찾게 해 주었으니까요. 제가 6살 때 엄마의 이끄심에 우리 가족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고 가톨릭의 절차에 따라 10살 때 첫영성체를 모셨습니다. 고된 생활속에서도 열심히 성당 활동을 하시는 엄마를 통해 어린 맘에도 막연히 예수님이 좋았고, 성모님이 좋았습니다. 그러다 부모님은 장사를 시작하게 되시면서 정들었던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여러 번 이사도 해야 했고 몸과 맘이 지쳐서인지 그나마 우리 가정의 신앙적 주체가 되어주셨던 엄마마저 냉담하시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선 너무나 미약한 저를 가정을 지키는 작은 신앙의 불씨로 써 주셨습니다. 

사춘기 시절 부모님의 지나친 간섭이 부담스러워 벗어나고만 싶은 제게 ‘우정’이라는 걸 알게 해 준 친구들을 보내주셨고, 그 친구들 또한 같은 신앙의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주일이면 혼자서라도 성당으로 인도해 주심은 물론이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동아리 활동을 통해 소외된 이들을 위해 진지하게 고미하며 함께 할 수 있는 시간과 터전 또한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역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신자였기에 우린 양가의 축복과 은총으로 혼배성사를 받을 수 있었고, 너무나 사랑스런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신앙인으로서 채워지지 않는 주님의 대한 확신과 믿음이 저를 힘들고 지치게 했습니다. 때마침 본당에서 견진 교리가 시작된다기에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고자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갈증은 해소되지 못한 채 매일 주어진 숙제를 하듯이 강박관념속에 기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묵주기도를 하면서도 “이런 기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주님께선 이런 기도를 들어주시기는 하실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왠지 묵주를 놓을수는 없었습니다. 그 즈음 전 놀라운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얼마 전 메주고리예에 다녀오신 부모님, 특히 아빠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과연 메주고리예의 무엇이 아빠 스스로 묵주를 들고 매일 기도하게 하셨을까? 엄마를 저토록 평안하게 해 주셨을까? 궁금했습니다. ‘나도 아이들이 좀 자라고나면 언젠가 가봐야겠다’ 란 생각만 한 채 엄두도 못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계신 이모에게서 갑작스런 전화가 왔습니다. “안젤라, 성모님이 널 부르시니 아무말 말고 메주고리예에 오렴” 저는 반가운 마음과 당황스런 마음이었습니다. 5살과 돌쟁이 아들을 두고 11일간 집을 비우기란 쉽지않은 결정이었지만 양가 부모님께서 기꺼이 아이들을 맡아주셨고 남편의 전폭적인 배려에 힘입어 모든 걱정들을 접어두고 홀가분하게 성모님 곁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막상 혼자 떠나려고 보니 모든 것이 두렵고, 일행을 잘 만날 수는 있을까 걱정하며, 인천공항행 버스에 몸을 싣고, 성모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데, 인천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그 일행을 같은 버스에서 만난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이런 우연으로 당신을 드러내 주시는구나’ 하며 감사했습니다. 


메주고리예는 정말 고요하고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분명 이곳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신다면 하루라도 빨리 내 눈으로도 보고 어머니를 체험해봤으면 하는 마음에 조급해졌습니다. 캄캄한 새벽에 별비을 받으며 맨 처음 십자가산에 오르면서, 빨리 무언가를 느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맨발로 무작정 올랐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날카롭게 솟구친 돌을 디딜때마다 괜한짓을 하고 있는건 아닐까? 혼란스럽고 갑갑해졌습니다. 온전히 주님과 어머니께 향하지 못한 제 맘을 다스리며 얼마의 시간을 보낸 후, 십자가산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어머니 어디 계신가요, 제가 이렇게 간절히 당신을 청합니다.’ 수 없이 되뇌이며 13처에 까지 왔을 때 묵주마저도 두 알을 남겨둔채 제 맘처럼 엉켜버렸습니다. 날도 어두워 보이지도 않아 풀 수도 없었습니다. 전 그대로 무릎을 꿇고 모든 두려움마저 버리고 애원했습니다. “어머니 당신이 아니면 전 아무것도 아니게 해 주세요” 그 때, 피범벅이 되어 죽으신 당신의 아드님을 품에 안고 목놓아 통곡하셨을 어머니의 고통이 새삼 제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내 고통이 아닌 어머니의 고통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지금껏 내 기도는 가슴으로 하는 기도가 아닌 머리와 입으로만 하는 암송에 불과했었구나’ 라는 생각과 더불어 늘 내곁에서 함께 하셨건만 그 어머니와 맘을 나누지도 못하면서 보여달라고 투정만 부렸던 제 자신에 대해 반성하며 통회하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울다보니 날이 서서히 밝아왔고 엉켰던 묵주도 풀 수 있었습니다. 


커다란 십자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면서 도착한 일행들과 함께 성가를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안젤라야 나를 사랑하느냐 ~ 오! 성모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 그때 마침 하늘에선 어머니의 기쁨의 눈물인양 빗방울이 살포시 내렸고, 전 감동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이제는 성모님의 현존하심이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뒤로 성모 어머니는 제게 당신의 존재를 자주 드러내 주셨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진한 장미향으로 당신을 느끼게 해 주셨고, 그곳서 알게된 언니와 둘이서 한밤중에 길을 잃고 헤메일땐 처음보는 강아지를 통해 낯선 집 앞 성모님상 앞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으며, 메주고리예를 떠나오는 날엔 당신의 아쉬운 맘을 전해주시려는 듯 아침부터 빗물을 뿌리시더니 이내 커다란 무지개가 우리의 가는 길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하느님과 땅위에 있는 모든 짐승들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할 것이다” 라고 하셨듯 우리에게도 그 계약의 표징을 주셨음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었던지 모릅니다. 


또한 이번 순례의 지도신부로 오신 왕영수 신부님을 통해 미사의 의미와 복음말씀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으며, 특히 성령의 신비에 대해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미국, 한국, 거주지는 달라도 주님 안의 우리 모두 한 형제이고 자매였기에 90명이 넘는 많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헤어질땐 아쉬운 마음에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었는데, 지금도 가끔 그때 함께했던 몇몇분들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현재,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젊은 친구들이 메주고리예 피자방을 만들어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지낸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도 한 번쯤 이 방에 들어소셔서 서로 인사 나누며 지냈으면 좋겠네요. 


저는 메주고리예를 통해 지금까지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던 신앙생활의 틀에서 벗어나 가슴으로 느끼는 주님의 사랑, 성모 어머니의 평화를 내 삶 속에 실천하며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메주고리예에서 어머니가 그토록 우리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때, 하느님 보시기에도 좋으실거라 믿기에, 나의 이웃에게도 어머니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명에 동참하려 합니다. 당신의 작은 도구로나마 쓰여지기를 바라며..... 

메주고리예 소식지가 필요하신 분은 아래의 한국 주소로 연락주시면 열심히 보내드리겠습니다. 


( 평화의 모후 선교회 발행 '메주고리예' 소식지 14호 나눔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