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of Peace Missionaries 평화의 모후 선교회
발현이란?

성모님의 발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보통 먼저 이 용어를 과달루페, 루르드, 파티마, 그리고 최근에는 메주고리예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 하느님의 어머니의 발현에 관한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분께서 다른 곳에서도 발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학, 즉 교회는 여전히 발현지들을 의문시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성모님의 발현이 교회에 의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직 이성으로만 사물에 접근하는 과학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 교회가 취하는 입장에 영향을 주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성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모든 것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신념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사건은 객관성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성에도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것이다. 모든 것이 이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또한 큰 역할을 한다.성경을 보면 그 안에도 발현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구약성경에서 발현들이 종종 언급된다. 이러한 언급은 사도행전을 제외한 신약성경에서는 좀 더 적게 나타난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많은 성인들의 삶 속에서 발현들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발현이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자면 발현이란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가시적인 계시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지성으로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 그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계시는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끝난 까닭에 발현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다. 발현의 목적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계시를 새롭게 조명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주요 계시와 특별 계시로 구분한다. 발현들이 사적 계시로 여겨지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신학적 관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사적 계시는 공적 계시와 다르지 않다. 사적 계시는 두 가지 형태를 지니고 있다. 1) 발현하는 인물이 물리적으로 보인다. (엄격한 의미의 발현) 2) 인간의 환상에 신적인 영향력이 미친다. (상상의 발현) 첫 번째 경우 외부적인 감각 기관으로 발현이 지각되는 반면 두 번째는 내적인 것으로 지각된다. 발현은 신비적이고 예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신비적인 발현은 다만 한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되고 그의 정신을 비추어준다. 그러나 예언적인 발현은 발현 목격자에게 경고, 요청 혹은 예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라는 사명을 부여한다. 발현을 접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그들 또한 길을 잃은 방랑자 집단에 속하지 영광된 이들의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그렇듯이 신앙적으로 고민하고 세상적인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교회의 입장 비록 공적 계시는 종결되었지만 하느님은 발현을 통해 인류에게 당신을 여전히 드러내 보이신다.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더불어 하느님이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분의 말씀은 교회의 본질과 제도화된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이를 언급하고 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신학자로 여겨지는 칼 라너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리고 기회가 닿는 대로 교회를 자극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교회 공식 조직을 통하지는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발현과 계시 문제를 다룰 때 뒷짐을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 봉사자들은 발현을 용인해야 할 뿐 아니라 그를 잘 보살펴야 한다.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가지 많은 은사로 축복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대부분의 경우에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준하는 문제에 대해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교회는 교회의 모든 지도력뿐만 아니라 신앙을 온전하게 보존하는데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어떤 한 가지 혹은 또 다른 발현의 영향력이 커졌을 때, 실제로 많은 이들이 신앙의 내용을 바꾸거나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려고 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발현지가 교회의 인준을 받지 않는 한 사제들이 순례를 인도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 장소에서의 발현이 교회에 의해 인정받지 않는 한, 교회는 성직자가 발현의 장소로의 성지순례를 이끄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가 정신을 소멸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교회 여러 공의회의 신념이기도 했다. 교회 영성은 영들의 식별을 장려한다. 사적 계시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고, 성경에 적혀 있으며, 교회 전승이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는 신적 계시와 절대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사적 계시에 대한 교회 문헌들은 사람들이 진리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발현은 교회의 권위와 일치한 가운데 고려되어야 한다. 사적인 발현들과 연관된 대부분의 실수는 너무 쉽게 믿는 경향 때문에 벌어진다. 이는 특별히 특히 세상이 어지럽고 불안정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발현의 열매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실제로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신중한 입장을 취할 의무가 있다. 한 개인의 영성 생활을 위하여 자신의 주관척인 체험이나 타인의 체험들을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누구든 공적 계시와 교회 지도력에 그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비록 교회가 사적 계시를 용인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의무적인 것은 절대 아니다. 공적 계시를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더욱 더 강하게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적 계시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마리아 발현 우리 시대에 성모님의 발현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것을 놀랍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성인들의 통공 안에 있는 교회 신비체의 다른 모든 구성원들과도 역시 가장 가깝게 있다고 신학자들은 말한다. 그분은 하늘로 올림을 받은 주님의 종, 하느님의 어머니, 그리고 우리들의 어머니이시다. 교회의 은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보내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하느님 대전에서 전구하신다.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발현을 통해 그분은 우리가 참된 신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초대하신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성모님을 따를 때, 우리는 매일 우리를 괴롭히는 악을 좀 더 수월하게 극복하고, 교회의 원수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참으로 종교적인 삶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기도와 속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그 문 안에 있는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이들과 그 문을 통해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계신다.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예수님께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성모님 발현에 너무 큰 가치를 두어 그리스도교가 제공하는 다른 모든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성모님의 발현을 세상 종말이 가까웠다고 믿으면서 이를 그 표징으로 해석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성모님의 발현은 언제나 특정한 시기에 발생했다. 또한 그것은 항상 공식적인 입장과 백성들의 입장 양쪽 모두에서 해석되었다. 결국에는 양쪽의 해석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다. 현대인은 마리아 안에서 그 자신을 인식하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 세상에서 그분과 함께 적극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이란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그가 충족 시켜야 할 전통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그는 겸손하게 사셨던 마리아처럼 행동한다. 성모님을 모범으로 삼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발전시키는 일에 뛰어든다. 마리아께서는 적게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몸으로 보여주셨다.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항상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이미 그리스도교 초세기에 마리아의 영향으로 자선 기관들이 많이 생겨났다. 노인과 병자들을 위한 병원들이 건설되었고, 이를 위해 많은 이들의 기부가 이어졌다. 중세에도 역시 오직 자선의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수도회들이 생겨났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성지순례와 순례지 자신의 신심을 표현하기 위해 성지 순례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오늘날 어느 곳에서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때는 급격한 문화적 변화 때문에 성지순례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기도 했다. 알려진 인류 역사의 전 과정 동안 성지순례는 개인적이고 상호적인 종교 체험으로 인식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성지순례에 대해 알고 있다. 성지순례의 본질은 일정 기간 동안 거기에 머물기 위해 먼 곳으로 가는 것이다. 순례자는 이 여정 중에 혹시 어떤 때는 잠시 중단하게 되더라도 그 여정을 떠나는 사람이다. 그는 온전히 영성과 수덕 생활을 하면서 더 많은 것을 버리고 고난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 항상 성지순례 장소와 연관시켜 순례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순례자와 순례 장소는 하나가 되어 성스러운 그 무엇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정 중에 있는 순례자들과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지 순례 장소가 어떤 성스러운 것이나 성스러운 힘의 수호자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또한 어떠한 경우라도 그런 장소들이 초자연적 사건이나 특별한 계시의 중심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보통 하느님의 은총을 간청하기 위해 성지 순례를 한다. 때때로 얼마나 많은 기적이 일어났는가에 따라 성지의 가치를 판단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이는 속죄하기 위해 성지를 방문하기도 한다. 성지 순례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응답이 되어야 한다. 분명히 하느님은 백성들이 죄를 고백하고 기도하는 바로 그 자리에 계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오늘날의 문제들과 언제나 관련되어 있다. 성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항상 교회를 향상시키는데 공헌해야지 결코 교회를 파괴하는데 기여해서는 안 된다. 소위 마리아 성지 순례라는 것은 특별한 성격을 갖는다. 사람들은 하느님께 좀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해 마리아께 의지한다. 그분은 그리스도인들을 예수님께로, 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을 모아들이신다. 마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통해 하느님의 빛을 비추어준다. 마리아를 통해 인도되는 길은 현대의 모든 성지순례의 기초가 된다. 어떤 이는 심지어 이것이 성지순례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모님은 교회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잘 알고 계신다. 그분은 이미 우리들에 앞서 그 길을 걸어 하느님께서 가셨다. 그분은 우리의 모범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마리아 성지에서 행해지는 성모 신심은 구원의 역사를 통해 그분께서 보여주신 역할과 부합해야 한다. 성지 순례를 함으로써 교회의 삶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삶에서 마리아께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발견하기도 한다. 이렇게 그분과 함께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최근 들어 메주고리예 본당은 마리아 성지 순례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가 되었다. 1981년 6월 24일 이래 2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메주고리예를 방문했다. 이 성지순례 장소의 가장 특별한 특징은 고해성사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는 자신과 화해하고 하느님과 화해한다. 이 모든 것이 메주고리예가 지닌 참된 교회의 모습을 확증해주는 것이다.

결론 성모님 발현의 미래 방향을 예언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각별한 주의를 가지고 교회의 입장과 일치하여 그에 대해 성찰하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와 같은 사건들 모두를 단순히 거부하거나 그것과 전혀 관계없는 어떤 힘에 의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분별없는 행동일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어려운 일이 많지만, 그것이 곧 우리가 절망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모님은 우리가 종교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자 하신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기회를 드리자!

밀롄코 스토이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