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 발현에 대한 요조 신부의 증언 

"함께 마음을 다해 기도하여라!"

 

 

 

성당 안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까?

성당 안 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 발현은  포도밭에서 일어나기도 했고 숲속이나 집에서 일어나기도 했는데, 어린 아이들은 경찰을 피해 늘 쫓겨 다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현시간이 되어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발현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혹시 아이들과 함께 그런 발현에 참여하신 적은 없었는지요?

한번도 없어요. 제가 제대에서 로사리오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제 곁으로 왔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 아이들이 기도를 할 줄 아는지도 몰라서 제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동정녀께서 나타나셨을 때, 저는 기도를 중단하고, 그분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성가를 불렀어요.

 

동정녀께서는 매일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라고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함께 마음을 다해 기도하여라! 1984년 8월 11일 1985년 5월 2일 1986년 1월 23일 1987년 4월 25일 등등.”  그리고는 저희들을 축복해주셨습니다. 발현이 끝난 뒤 저희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기도를 시작한 것은 성모님의 초대에 응답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동정녀께서 신부님과, 아이들,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계실 때 발현하셨다는 겁니까?

그래요, 동정녀께서 사람들로 꽉찬 바로 그 성당 안에 오셨습니다! 수천 명이 성당 안과 밖을 잔뜩 메우고 있었습니다. 성체를 분배하지 못할 정도였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손을 내밀 수 조차 없었으니까요. 여기저기에 사람들로 가득차서 지나갈 수도 없었고, 제대가 있는 곳이나 제옆이나…. 할 것없이 사람, 사람이었습니다. 제의방에도 들어갈 수 조차 없었습니다.

 

 

신문지상에서는 신부님을 고발하고 있었지만 주교님께서는 여전히 아이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런데 주교님께서 신부님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주교님과 신부님은 어떤 관계셨는지요?

좋은 관계였습니다. (…) 주교님조차도 고발당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교님께서 저를 찾으셨습니다. 벌써 며칠 째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던 저는 자동차 운전을 하는 게 염려스러워 이반 칠리치 신부님께 모스타르까지 태워다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주교님께서는 저만 따로 만나고 싶어하셨어요. 응접실 창문가로 저를 데리고 가시더니, 눈에 눈물이 잔뜩 고인채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조신부님, 제가 사라예보로 호출당했어요. (…) 계속 메주고리예를 보호하고 편을 들게 될 때, 저를 체포한답니다. 고작 메주고리예 때문에 감옥에 가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저는 주교입니다!”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아연실색해졌던 겁니다. (…)

 

얼마가 지나서 두 명의 프란치스꼬 사제들이 포함된 열 두어명 정도 되는 신부님들이 주교님을 찾아가서 잘못하면 주교직에서 면직당할 수 있다고 위협하면서 그분을 추궁했습니다. 주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조신부님, 주교직에서 면직당해 시골마을의 신부가 될 수 없어요. 신부님 생각에 제가 시골마을의 보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주교라구요.”

 

주교님과 저사이에 일어난 이 에피소드는 공산당원들이 30 여명이나 되는 증인들 앞에서 저에게 강제로 대답하도록 종용하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그 날 재판에서 처음으로 공개했어요. 그 이후로 이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문서로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 뒤, 주교님께서 증인으로 서셨습니다.

 

공산당원들이 제가 한 말을 주교님께 그대로 하면서 그 말이 사실이냐고 했을 때 주교님께서는 제가 보는 앞에서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대답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주님을 모독한 뒤,  누군가 제게 진짜냐고 물었을 때 “주님을 모독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라고 답하는 것과 같은 주교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어요. (…) 그분의 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그분을 대항하거나 판단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제게는 참 이상한 했어요. 저는 늘 주교님을 향한 큰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었거든요.  인간적인 나약함들이었는데 이런 것을 이용해 그누구도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무척 유감이었습니다. (…) 정말 가슴이 아팠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주교님의 용기없는 행동은 그렇다치더라도 신부님은 그 당시 늑대들의 손에 던져졌던 거군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식으로 주교님께서 제게 등을 돌리신 것과 자신의 확신을 거부하신다는 것이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거나 분명한 이유를 토대로 하지 못한 채 메주고리예를 반대하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저를 마음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주 순례자들에게 두려움에 속박되지 않도록 주의하도라고 충고행요.  그 당시에는 직장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많은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고, 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메주고리예를 반대할 이유만을 찾으면서 두려움에 복종한 약한 이들이었습니다. (…) 주교님께서는 자신의 위치와 이익을 위해 메주고리예 사건을 비판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정부를 두려워 하시면서 공산정부가 주교직에서 면직시킬까봐 메주고리예가 거짓이라고 말씀하시기 시작했다는 겁니까?

주교님께서는 제게 보내신 편지에는 이미 공개적으로 메주고리예를 반대하고 계셨습니다. 말한 것처럼 이런 일이 있기 전 저는 교리교육 활동에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주교위원회 산하 교리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 15년 째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런 저에게 모스타르의 보좌주교님이셨던 당시의 주교님께서 제게 축하전문까지 보내셨었지요. 축하전문요! 또 저는 어린아이들의 교리교육에 공헌한 점을 인정 받아서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는 영광까지 얻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발현 전의 일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교리교육분야에서의 제 활동을 아는 사람은 제 경험을 믿어 주었고, 제가 함부로 아무 것에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저는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요상스런 행동들을 무척 경계하는 사람이었지만 일어난 사건을 부정할 수는 없었는데, 말하자면 본 것을 그전에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었다는 거죠!

 

주교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어요. “공산당원들이 저를 위협했고 가두겠답니다!” 진짜 감옥에 가두었을 거예요 (…) 저는 고통당하고 있었지만 그런 주교님을 이해했습니다. 물론 로마에서부터 온 그 어떤 사제의 행동과 다른 사제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