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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잘 되는 것이 슬픈 – 부러움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죄

 
당신이 가지고 싶은 어떤 것을 가진 다른사람에 대해 질투하고 있지 않은지?  
그의 부를 갖고 싶고, 그의 외모 혹은 그의 장점을  갖고 싶은지..  그의 행복, 그의 번영, 혹은 성공을 원하는지..
 
 부러움은 질투와 함께 근원을 찾아 가보면, 깊은 유래가 있다.  부러움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일뿐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를 미워한다는 것이다.  부러움은  영혼안에 숨어 있는 암과 같다.  부러움을 갖는 사람은 다른사람의  행복, 성공, 번영등과 같은 것에 집착  하게 되며 그것이 심해지면 결국 다른 사람의 행복이 파괴되길 원하게 된다.
 
 그렇다면 부러움이 죽음을 불러온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첫 인간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시지만  카인의 제사는 거부하신다. – 그러한 동생이 부러웠던 카인은  분개하며 자신의 동생을 살해한다.  성서의 시작부터 나오는 이 비극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부러움이 죄의 근원임을 상기 시킨다.  이는 우리의 첫 조상의 불순종에서 시작된 죄가  아들에게 이르러 부러움으로 나타나 그로부터 온갖 죄가 파생되는 것이다.  
 
 부러움은 욕망, 탐욕, 탐식과 같은 불만족의 욕구이다.  부러움으로부터, 도둑질, 사기, 간음, 살인등이 파생된다.  부러움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뻗친다: 남의 소유, 남의 부, 남의 아내, 남의 생명… 
 
부러움은  근원적인 두려움과 사랑에 대한 갈망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다른 사람이 부러운 이유를 잘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자신이 가지지 못한  행복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행복하고 나는 불행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  행복은  그는 사랑받고  있고, 이해 받고 있는 표시이나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결핍은 깊은 곳에 불안정한 두려움으로서  잠재해 있고,  소외감과 불행이라는 느낌으로부터 음침하고 난폭한 야수 처럼 부러움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불안정성 안에서 방황하며  앙심을 품거나  잘못된 생각으로 상처를 덧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를 하거나 복수심을 갖기도 한다. 
 
 부러움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려는 바램을 갖게 하므로, 이는 친절 혹은 호의와 맞서는 죄이다. 친절 혹은 호의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며 해를 입히려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덕목과 같이 이 호의와 친절은 선행을 하고 긍정적이며 내어 주는 삶을 산다.  친절과 호의는 또한 빛으로 충만하며 단순하다.  부러움이 작은 것, 사소한 관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면 친절 혹은 호의 또한  영웅적인 행위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따뜻한 행위와 같은 일상적인 작은 것이다.  호의적이고 친절한 사람은  미소와 유머와 격려의 말, 축복된 삶에 대한 진정한 감사, 그리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일들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호의적이고 친절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좋은 일에 대해 화가 나거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한다.
 
성인들은 부러움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인성의 근원이 조건없이 사랑받고 있고, 그것에로만  향하고 있음을 아는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부러움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는 깊은 슬픔과 자기혐오가 있다.  그러한 마음의 어두움은 우리의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을 알게되는 심오한 체험으로써 치유되어져야 한다.  이 사랑을 알게 되면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듯이 부러움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바램이고, 우리의 삶의 여정의 마지막까지 노력해야할 목표이다.  


Editor’s note: This is the seventh part in an eight part series exploring the Seven Deadly Sins. Check back each Wednesday and read previous articles here. 

 
< catholicexchange에서  역: wisdom >